한중옥, 돌에 응축된 시간과 삶을 새기다

박종진 기자 / 기사승인 : 2026-10-30 21:53:32
크레파스와의 인연 그 50년 ‘백만번의 칼질’전…11월 4~23일 서울 인사아트센터
독창적 재료, 칼로 구축한 독자적 조형세계…제주 자연과 인간 실존의 흔적 탐색

[SWTV 박종진 기자]제주의 돌은 침묵하지만 그 표면은 무수한 시간을 발설한다. 용암이 식어 굳은 태초의 기억에서부터 파도와 바람이 남긴 침식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돌의 거친 결에는 자연이 스스로 기록한 역사가 잠재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언어로 환원하기 어려운 시간의 밀도와 물질의 생애가 존재한다.

 

▲'풍화혈', 종이에 크레파스, 109×158cm

 

제주 서귀포의 화가 한중옥이 오랫동안 응시해온 것은 바로 이 돌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이다. 그에게 돌은 풍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이 가시화된 존재이며, 자연의 무수한 작용이 응결된 조형적 실체다. 돌 표면의 균열과 주름, 구멍과 돌기는 생성과 소멸, 저항과 침식, 지속과 변화가 서로 길항하며 형성한 시간의 지문이다.

 

이러한 한중옥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백만번의 칼질’전이 11월 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크레파스와의 인연 50년을 돌아보며 독창적인 재료 운용과 치열한 조형적 탐구로 구축한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자리다.

 

한중옥의 회화는 자연의 시간성을 인간의 조형적 시간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크레파스를 겹겹이 쌓고 칼로 긁어내는 작업은 색채를 더해 형상을 완성하는 통상적인 회화의 방식과 역행한다. 오히려 축적된 물질을 제거함으로써 그 내부에 잠재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리기이면서 지우기이고, 축적이면서 침식이며, 회화인 동시에 조각이다.

 

자연의 침식과 인간의 노동, 시간의 두 층위

 

한중옥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크레파스라는 재료의 이례성 자체보다 그 재료를 통해 성립되는 조형적 사유다.

 

▲'풍화혈', 종이에 크레파스, 109×158cm

 

크레파스는 통상 즉각적인 색채 표현에 적합한 재료로 인식된다. 그러나 한중옥은 이 친숙한 재료의 성질을 역전시킨다. 화면에 겹겹이 쌓인 색채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미지의 잠재적 지층이다. 칼끝이 그 표면을 통과하면서 감춰져 있던 색의 단면과 선, 미세한 결이 비로소 출현한다. 그에게 회화란 백지 위에 형상을 부여하는 행위이기보다 물질의 내부에 잠재한 형상을 발굴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처럼 이미 만들어진 것을 제거하는 작업방식은 제주 용암석의 생성과 변화 과정에 맞닿아 있다. 돌은 형성된 순간 완결된 존재가 아니다. 바다와 대기, 빛과 온도의 변화에 노출되면서 끊임없이 마모되고 새로운 형상을 획득한다. 자연의 풍화와 침식은 파괴인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생성이다.

 

한중옥은 이 자연의 작용을 화면 위에서 반복한다. 크레파스의 중첩이 시간의 퇴적이라면 칼의 절삭은 풍화와 침식에 해당한다. 자연이 오랜 세월 수행한 물질적 변형을 작가는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통해 압축적으로 재연한다.

 

여기서 칼은 붓을 대체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붓이 물질을 더하면서 이미지를 구성한다면 한중옥의 칼은 물질을 덜어내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낸다. 반복되는 덧칠과 절삭, 긁기와 문지르기는 단순한 기술적 숙련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에 접근하기 위해 선택한 신체적 사유의 방식이다.

 

그의 작품은 완성된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에 도달하기까지 수행된 노동의 흔적이다. 물질을 다루는 기술과 존재를 성찰하는 정신적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까닭이다.

 

돌은 그림의 소재이기에 앞서 이미 하나의 그림이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조형적 결과를 인간이 다시 회화로 번역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번역은 원본의 복제가 아니다. 작가의 시선과 선택, 확대와 생략, 색채의 중첩과 칼의 개입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자연물은 독립적인 회화적 실재로 변모한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한중옥의 작품에 대해 “구상과 추상, 재현과 환상이 공존하는 그림”이라며 “한중옥은 구체적인 돌에서 정직하게 출발해 그것이 궁극에 추상으로 보이는 지점을 마술처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사실적 묘사를 근간으로 하지만 돌의 표면에 산재한 점과 선, 주름과 구멍이 독자적인 추상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화면에서는 움푹 파인 구멍이 돌출된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견고한 바위의 표면이 유동하는 물결이나 미지의 지형처럼 지각되기도 한다. 음각과 양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교란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착시를 넘어 대상의 실재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음을 환기한다. 

 

한중옥이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정확한 재현보다 그 안에 잠재한 다층성과 불가해성에 대한 감각이다. 극도로 정교한 묘사가 오히려 사실성의 한계를 넘어 추상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제주의 돌, 인간 실존을 비추는 시간의 은유

 

한중옥의 회화에서 제주라는 장소는 단순한 지역적 정체성의 표지가 아니라 작가의 생애와 감각, 기억과 사유가 형성된 근원적 공간이다. 서귀포의 바다와 바위는 외부에서 관찰한 풍경이 아니라 오랜 삶의 시간 속에서 체득한 세계다.

 

▲'시간과 인식', 종이에 크레파스, 110×190cm

 

그는 제주 바위를 바라보면서 강한 부분은 남고 약한 부분은 깎여나가는 자연의 작용을 인간의 삶과 연결해왔다. 파도와 바람 앞에서 형태를 바꾸면서도 존재를 지속하는 돌은 시련과 상처를 통과하는 인간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그에게 돌은 단단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마모되고 변형되며 자신의 흔적을 축적하는 존재다. 돌의 견고함은 변화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침식을 견디면서 지속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다뤄온 해녀와 소나무, 불상과 마애불에서도 발견된다. 거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해녀, 바람을 견디며 성장한 소나무, 세월에 마모된 불상의 형상에는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형성된 존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에 대한 천착은 이러한 관심을 가장 응축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바위의 균열은 고통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살아남은 시간의 증거다. 구멍과 주름, 마모된 표면은 결핍의 표지가 아니라 존재가 통과해온 세계의 기록이 된다. 한중옥이 돌을 하나의 우주에 비유해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별적인 돌에는 자연의 물리적 작용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삶을 투사할 수 있는 무수한 상징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의 회화에서 시간은 추상적인 관념에 머무르지 않는다. 색채의 층과 칼자국, 마찰과 절삭의 흔적으로 구체화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물질의 표면을 통해 가시성을 획득한다.

 

한중옥의 크레파스 회화가 지닌 독자성은 이러한 예술관에서 비롯된다. 평범한 재료로 자연의 심연을 탐색하고, 표면을 벗겨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시간과 실존의 문제를 사유한다. 덧칠은 기억의 퇴적이며 절삭은 망각과 침식의 과정이다. 그러나 제거된 자리에서는 새로운 형상이 출현한다. 생성과 소멸의 변증법이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을 동시에 관통하는 것이다.

 

제주의 돌은 그의 화면에서 더 이상 단순한 풍경의 일부가 아니다. 자연이 남긴 시간의 기록이며, 인간의 생애를 비추는 은유이자,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해체하는 조형적 장이다. 오랜 세월 자연이 돌에 새긴 흔적을 작가는 크레파스와 칼로 다시 기록한다. 자연의 시간이 인간의 노동을 통과해 회화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한중옥의 예술은 결국 돌을 얼마나 정교하게 그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돌이라는 물질을 통해 시간의 본질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자연이 남긴 흔적에서 인간 존재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것인가에 관한 지속적인 물음이다. 그에게 돌의 표면은 풍경의 끝이 아니라 사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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