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피고 짓이겨진 9천 송이 ‘카네이션’…25년 만에 돌아온 피나 바우쉬의 유산

임가을 기자 / 기사승인 : 2025-11-08 07: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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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LG아트센터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카네이션’이 25년을 건너 다시 같은 무대에 섰다.


피나 바우쉬는 무용과 연극을 결합한 무용극 ‘탄츠테아터’ 장르를 발전시킨 독일 대표 안무가다. 무용단 ‘탄츠테아터 부퍼발’을 이끌며 무용, 연극, 음악, 무대미술, 일상의 몸짓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했고, 36년간 총 44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  [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LG아트센터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카네이션’이 25년을 건너 다시 같은 무대에 섰다. (사진=LG아트센터)

 

그는 2009년 타계했지만, 이후에도 탄츠테아터 부퍼발은 그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 다양한 국가 출신의 34명의 무용수가 활동하고 있고, 내년에는 피나 바우쉬 센터 개관과 새로운 예술감독 선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 무대에 오른 ‘카네이션’은 1982년 초연된 피나 바우쉬의 초기 걸작으로, 무대 위를 수놓은 카네이션 벌판이 상징적인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2000년 당시 LG아트센터 개관작으로 소개된 작품으로, 피나 바우쉬와의 끈끈한 인연의 시작점이 되어주기도 했다.

지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현정 LG아트센터장은 “‘카네이션’은 피나 바우쉬가 개관작으로 추천했었던 작품이다.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잃지 않는 인간성, 희망을 말하는 작품의 주제와 무대 위 심겨 있는 9천 송이 카네이션이 주는 화사함이 개관 공연과 잘 맞을 것 같다고 했었다”며 회상한 바 있다.

초연과 마찬가지로 17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오르지만, 2019년 이후 합류한 새로운 세대의 무용수가 대다수라는 점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피나 바우쉬 생전에 함께 작업했던 안드레이 베진, 아이다 바이네리는 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무용수로 활약하고, 에디 마르티네즈, 실비아 파리아스는 리허설 디렉터를 맡아 무용수들을 이끌었다.

 

▲ 사진=LG아트센터


1996년 탄츠테아터 부퍼발에 입단해 유일한 한국인 단원으로 이름을 올린 김나영 역시 리허설 어시스턴트로 참여했다. 2000년 내한 공연 당시 무용수로 참여했던 그는 독일 유학 당시 처음으로 ‘카네이션’을 감상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나영은 “발레를 배운 사람으로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발레에서는 주역이 있고, 나머지는 그 주역을 서포트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카네이션’에서는 모든 무용수가 각자 같은 시간에 다른 것들을 했다. 내 눈은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다 수용할 수는 없더라”며, “무엇을 본 건지 잘 몰랐는데, 다시 한번 공연을 보고나니 피나 바우쉬가 더 알고 싶어졌다”고 전했다.

‘카네이션’은 인터미션 없이 110분을 내달리며 작품을 선보인다. 철저하게 짜여져 있는 안무를 소화하기보다는 연기가 가미된 추상적인 움직임과 대사를 선보이는 이들은 무용수보다는 배우와 가깝게 보인다. 탄츠테아터 부퍼발은 공연하는 국가에 맞는 언어를 선보이는 만큼 배우들은 영어, 프랑스어와 함께 한국어 대사를 소화하기도 한다.

수천 송이의 꽃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무대와는 달리, 작품에서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절규하는 사람을 무섭도록 노려보며 테이블 위로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과일을 억지로 먹고 삼키느라 나는 힘겨운 소리는 마이크로 송출했다. 여권을 검사하고 동물 흉내를 내라 요구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검열관은 절로 숨이 막히고, 잘게 썬 양파에 자해하듯 얼굴을 들이박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 ‘헉’ 소리가 나게 만들기도 했다.

 

▲ 사진=LG아트센터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건 폭력과 위압에 저항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피해자를 포용하는 이들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꽃밭 위로 거대한 박스를 쌓아 올릴 때 혼자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막아서는 여자, 소외되어 고장이 난 듯 멈춰선 한 사람을 어떻게든 다시 움직이게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은 인간의 따스한 이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러한 희노애락을 거치는 동안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던 들판은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처음의 형체를 연상시킬 수 없을 망가지지만, 무용수들은 사계를 상징하는 제스쳐와 함께 행진하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짓이겨진 들판으로부터 또다시 꽃이 필 것이라 말한다.

명확한 기승전결이 없고, 온전히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관객들은 작품이 주는 에너지만으로도 ‘카네이션’을 느낄 수 있다.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예술감독 및 운영총괄을 맡고 있는 다니엘 지크하우스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무대에서 본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각각의 관객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그는 본인만의 해석을 관객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았다”며 해석의 폭을 자연스럽게 열어두었다.

한편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은 오는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14~15일에는 세종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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