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희 작가 ‘백자초상’ 초대전…‘백자의 침묵, 현대 회화로 번역’

박종진 기자 / 기사승인 : 2026-05-07 20: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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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랑, 이달 17일까지 전시…한국적 미감의 현재와 미래
재현을 넘어 ‘시간의 초상’을 그리는 독창적 회화세계

[SWTV 박종진 기자] 조선백자를 하나의 유물이나 미술사적 대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인간의 기억과 시간, 감정이 축적된 존재로 다시 호명하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서울 창덕궁 돈화문 앞 공화랑에서 오는 17일까지 전시하는 허승희 작가의 ‘백자초상白磁肖像’ 초대전에서는 회화 13점과 실제 조선백자를 함께 선보인다. 전시 제목인 ‘백자초상’은 백자를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초상’으로 바라보겠다는 작가의 시선을 함축한다. 

 

▲ 공화랑에 전시 중인 작품 ‘여유 Poise’.

 

작가는 백자를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세월을 통과해온 존재로 읽어내고, 그 안에 스며든 시간과 감정, 정신과 기운까지 회화로 옮겨낸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 서면 백자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랜 시간을 살아낸 존재와 마주 앉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전통 재현도, 고미술의 현대적 차용도 아닌 한국 문화유산을 통해 ‘시간이 인간에게 남기는 흔적’을 탐구하는 깊은 정신적 작업에 가깝다.

 

허승희 작가의 작업세계는 그의 이력과 관련 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고고미술사학과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도 동양화를 연구했다. 동시에 다년간 문화유산 복원과 모사 작업에 참여하며 실제 유물과 긴 시간을 마주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순종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전도’, 경복궁 교태전 부벽화 등 국가 문화유산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복원 작업은 단순히 옛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일이 아니다. 시대의 재료와 안료, 붓의 움직임, 종이와 흙의 질감, 당시 사람들의 감각까지 읽어내야 가능한 작업이다. 허 작가는 바로 그 과정에서 문화유산이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 전시작 ‘달의 초상月之肖像’.

 

허 작가는 “유물은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존재다. 표면의 흔적 하나에도 지나온 계절과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다”며 “백자를 바라보면 인간의 얼굴을 보는 느낌이 있다. 조용하지만 강하고, 비어 있지만 깊다. 나는 백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시간을 그린다”라고 말했다.

 

허 작가의 이같은 인식은 이번 ‘백자초상’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 작가는 백자를 정물처럼 배치하지 않는다. 화면 속 백자는 마치 초상화 속 인물처럼 독립적 존재감을 지닌다. 백자의 미세한 곡선과 유약의 흐름, 표면의 온기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며, 그것을 인간의 표정처럼 읽어낸다.

 

특히 작품 제목 ‘평온 Serenity’ ‘여유 Poise’ ‘청아 Graceful’ 등은 단순한 미적 수사가 아니라 유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정서의 기록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물성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번역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김이순 미술평론가는 “그의 회화는 문화유산의 재현을 넘어선다. 그는 백자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정신성을 화면 위에 복원한다. 이는 단순한 고미술 차용이 아닌 한국적 미감의 현대적 재해석이다”라고 평가했다.

 

허 작가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단순한 묘사를 넘어선 층위가 보인다. 붓질은 매우 세밀하지만 과시적이지 않고, 화면은 단순하지만 공백 속에 긴 호흡이 숨어 있다. 이는 조선백자의 미감과 현대 회화의 감각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백자기록 White Log’은 이러한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폭 3.5m 규모의 이 대형 작품은 조선시대 책가도의 구성 방식을 참고해 제작됐다. 선반 안에는 해외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된 조선백자 28점이 자리한다.

 

▲ 전시작 ‘백자기록 White Log’.

 

이 작품은 단순한 진열 이미지가 아니다. 흩어진 문화유산을 한 화면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회화적 아카이브’에 가깝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문화유산이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선 속에서도 새롭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허 작가는 “흩어진 백자들을 한 화면 안에 모으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 지점이 허승희 회화의 독창성이다. 그는 유물을 ‘과거의 물건’으로 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감각적 통로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그의 작품세계가 특별한 이유는 전통을 단순히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문화유산을 관념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 실제 유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그 안의 물성과 정신성을 회화적 언어로 변환해낸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복제의 느낌이 없다. 오히려 ‘새롭게 살아난 유물’ 같은 감각이 강하다.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서 전통은 종종 장식적 소재나 시각적 코드로 소비된다. 하지만 허승희 작가는 전통을 이미지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응시하고, 대화하면서 문화유산 안에 담긴 정신성과 시간성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다.

 

그 점에서 ‘백자초상’전은 단순한 개인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전시는 한국적 미감이 동시대 예술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는 실제 조선백자와 회화를 한 공간에 배치해 관람객은 유물과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며 ‘원본과 해석’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체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허승희의 작업은 한국회화가 나아갈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서구 현대미술의 형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유산 속에 내재한 정신성과 조형성을 현대적으로 번역하는 길이다. 

 

▲ 전시회 방문객이 허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편 지난 1970년 설립된 공화랑은 한국 1세대 상업화랑 가운데 하나로,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며 한국적 미감을 동시대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이번 전시는 전통을 박물관 안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대 예술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공화랑이 그간 추구해온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공화랑은 “허 작가의 작품 속 문화유산은 단지 오래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감각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는 존재다. 그래서 그의 백자는 단순히 아름다운 도자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견뎌온 존재의 얼굴이며, 침묵 속에서도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나의 초상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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